여론에 갈팡질팡하는 도시계획,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 몫

언젠가는 재개발 불가피 … 탁상행정 책임은 누가 지나

 

목포가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다는 한 국회의원의 부동산 대거 매입에 따른 투기논란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서울의 한복판 중구는 ‘을지면옥’ 사태로 달아오르고 있다.

을지면옥은 냉면 마니아들에게는 일종의 ‘성지’라 할 수 있다. 냉면 마니아들은 흔히 우래옥, 을밀대, 을지면옥을 서울 3대 냉면으로 치켜세운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호도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가본 곳이 을지면옥이다. 그만큼 오래된 노포(老鋪)이다.

그런데, 냉면맛집 을지면옥이 냉면이 아니라 도시개발과 얽혀 사회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을지로의 구도심 개발사업의 키(key)가 됐기 때문이다. 개발로 인해 을지면옥이 헐리게 됐다는 소식에 ‘보존’ 여론이 급등하자 서울시가 돌연 생활유산 보존 차원에서 을지면옥 등 16곳이 속한 구역의 재개발을 연말까지 중단한다고 나섰다. 이에 따라 개발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의견이 분분해졌다.

 

‘다시·세운’? 재개발 다시 세운!

1968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 주상복합건물인 세운상가는 한때 탱크도 만들고 인공위성도 만든다는 평가를 받던 전자상가의 메카였다. 흔히 세운상가라 통칭하지만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차례로 늘어서 있는 ‘세운상가~청계상가~대림상가~삼풍상가~PJ호텔~인현상가~진양상가’를 아우르는 7개의 건물군(建物群)을 말한다.

서울시는 이 세운상가군을 도시재생을 통해 재탄생시키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추진, 재생사업 1단계 구간(종묘~대림상가)을 지난 2017년 먼저 공개했다. 세운~대림상가 간 3층 높이 공중보행교 ‘다시세운보행교(총연장 58m)가 부활했고, 세운상가~대림상가 양 날개엔 각 500m 길이, 3층 높이의 보행데크를 만들어 청계천부터 이곳까지 걸어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세운상가 8층 옥상에는 전망대와 쉼터인 ‘서울옥상’이 문을 열었다. 남산과 종묘 등 도심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세운상가 앞 옛 초록띠공원은 ‘다시세운광장’으로 변신했으며, 다목적홀과 문화재전시관까지 갖추었다.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교육, 제작활동을 지원하는 ‘4대 전략기관 입주공간’ 및 스타트업의 창작 개발공간인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도 공모를 통해 선정된 17개 단체들이 입주했다. 서울시가 도시재생의 성공사례라 자평할 만큼 반응도 좋았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을지면옥도 이 세운상가군과 무관치 않다. 세운상가군 양 옆의 지역이 모두 도시환경개선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을지면옥은 이 가운데 3구역에 위치해 있다. 3구역은 또 7개 소구역으로 나뉘는데, 3-1·4·5 구역은 이미 철거 중이어서 기존 계획대로 추진된다. 하지만, 을지면옥이 위치한 3-2구역 등 나머지 4개 구역은 사실상 사업을 접어야 하거나 장기화 될 수밖에 없게 됐다.

을지면옥 사태가 불거지자 서울시는 1월23일 부랴부랴 '세운상가 일대 도심전통산업과 오래된 가게 보존 추진' 계획을 발표하면서 “연말까지 중단”을 선언했다. 이미 사업시행인가까지 받아 철거가 임박했던 사업을 사실상 백지화한 셈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2014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사업 계획 수립 당시에는 2009년 계획의 문제점을 우선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일괄철거로 인해 도심 물길과 옛 도시조직이 없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 단위를 쪼개고 물길을 보존하는 쪽으로 했다. 추진하면서 보니까 사회 흐름이 많이 바뀌었다. 도시재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시민 인식도 달라졌다. 을지로나 세운상가는 낙후되고 빈집도 많고 위험한 지역도 있지만 '커피한약방'(을지로 유명 커피숍)처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곳도 있다. 생각지 못했던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에 변화에 맞추기 위해서 여러 의견을 듣고 계획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서울을 다시 세우겠다며 자화자찬했던 도시재생계획을 불과 5년 만에 ‘사회 흐름의 변화’ 때문에 재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사고는 서울시가 치고 갈등은 주민들끼리

서울시 발표에 이번에는 개발을 추진해왔던 소유주들이 발끈하며 나섰다. 서울시의 발표가 있던 23일 세운3구역 소유주들은 ‘서울시 전면보류 결사반대’, ‘사방천지에 석면덩이, 건강하게 살 수 있게 정비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울시청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서울시에 항의하는 한 소유주는 “온갖 고생을 하며 10년이 넘게 추진해온 사업을 일부 여론에 밀려 갑자기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하는 게 책임 있는 행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동네 낡은 건물에는 대부분 화장실도 없어 지하철 공중 화장실을 써야 하는 처지이고, 한번만 방문한 사람이라도 건물의 안전과 화재 위험도가 높아 재개발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데, 이런 현실을 알고나 있는지 분통이 터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발사업을 추진 중인 세운3구역 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시장이 바뀌면서 한번 혼선을 겪어야 했고, 이후에도 서울시의 정책 혼선으로 10년이 넘도록 사업에 진척이 없어 소유주 모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도시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30여 년 동안 건물 증・개축도 하지 못했고, 토지담보대출 등 비용 문제로 고통을 받은 땅주인 가운데 수십 명은 땅이 경매에 넘어가기도 했다. 이제 겨우 개발이 되는가 했더니 이번엔 냉면집 때문에 못한다니 납득할 수 있겠는가"라며 “대한민국에서 집값이 가장 높은 강남에서라면 서울시가 하루아침에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겨우 10평 남짓의 토지를 소유한 채 몇 십 년간 고생해온 서민들에게 서울시가 갑질하는 게 아니고 뭐겠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토지소유주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어 이번 사태로 주민갈등이 더 심화될 우려도 대두되고 있다.

재개발에 반대하며 몇 달 째 천막농성을 펼치는 반대측에서는 “일단 서울시가 연말까지 사업추진을 중단한다고 나선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며 “서울시가 여론에 밀려 당장은 보존하겠다고 나섰지만 을지로 주변이 속속 개발되고 있는 만큼 결국 이리저리 내몰리다가 전부 철거될 가능성이 높다. 확실한 보존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시의 무책임한 정책수립과 취소에 대해 오랜 기간 재개발을 고대해왔던 소유주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함께 어울려 살던 주민들 간에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갈등만 쌓이니 이 또한 더 큰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다.

 

5년 앞도 못 내다본 졸속정책, 비판 마땅

세운3구역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8개 구역 중 가장 큰 곳이다. 오세훈 전 시장이 2006년 각종 공구상과 철물상 등이 밀집한 ‘공구거리’를 대상으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을 발표했지만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계획이 중단됐고, 이후 2014년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후 계획을 수정해 세운3구역을 10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눠 사업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3구역을 포함한 세운상가 지역을 ‘메이커 시티’로 만들겠다는 ‘2020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번 을지면옥 사태를 겪으면서 불과 5년 만에 자신들이 수립한 계획이 졸속이었음을 시인한 꼴이 됐다. 또, 을지면옥 등 생활유산으로 지정된 노포를 보존한다고 했지만, 일각에서는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생활유산으로 지정되는 뚜렷한 기준이 없다는 것도 보존가치 시비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번 사태로 인해 보존 가치가 있는 노포를 비롯한 생활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서울시의 발표처럼 도시재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쩍 높아진 상황이기는 하지만, 전문가들은 개발을 막는 것이 보존의 시작은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개발과 보존은 적대적인 게 아니라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기 위해서는 보여주기식 계획, 임기내 치적 쌓기 수단으로 개발이나 보존을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연말까지 서울시가 어떤 처방을 내놓을지 귀추가 자못 궁금해진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도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