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에이비라인 건축사사무소 박래훈 대표 / 한국도시정비협회 자문위원

박래훈 대표
(주)에이비라인 건축사사무소
한국도시정비협회 자문위원

‘건강한 건축물’

조금 이상하게 들리지 모르지만 건강한 건축물이란 어떤 건축물일까 고민해본다. 또, 도시에서 생명력 있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30년 가까이 건축설계를 해 온 건축사로서 요즘 들어 점점 힘들어 진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왜 그럴까 생각해본다.

부동산 및 주택시장에 대한 정부규제와 이로 인한 부동산·주택시장의 침체에 따른 원인으로 설계수주 환경이 악화된 이유도 있겠지만, 오늘은 건축설계전문가인 건축사로서 좋은 건축물, 건강한 건축물을 만들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자괴감에 하소연을 한번 하고 싶어졌다.

최근 언론에는 건축과 관련된 각종 사건사고에 대한 소식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큰 사회적인 이슈를 제공하는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새로운 건축규제와 기준이 하나씩 생겨나곤 한다.

건축설계자는 이와 같은 건축규제와 기준을 맞춰 인허가를 받기 위해 행정관청과 협의하고, 해당되는 위원회 심의를 거치느라 설계업무가 많아져도 건축주에게 용역비 인상을 요구하지도 못한 채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더욱이 지나친 경쟁구도에서 설계용역비도 많이 줄어들어 업무에 비해 부족한 실정인데, 예상하지 못한 설계지연으로 사업주에게 “일 못한다”고 핀잔만 듣는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대다수 건축설계업계의 현실로 건강한 건축물을 만들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두려움마저 느낀다.

사회적인 이슈가 되곤 하는 대형 사건사고가 날 때마다 많은 전문가들은 방송에 출연해 해당 사고를 대부분 ‘인재(人災)’로 규정한다. 건축 관련기술자들의 부주의와 행정관청의 관리감독 등을 사고원인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으로, 정부는 이러한 사건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관련 법령을 정비해 새로운 건축규제와 기준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사고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중 하나인 부실용역과 부실공사가 발생될 수밖에 없는 저가 용역비 및 저가 공사비를 문제로 지적하는 전문가는 없다. 전문 기술자들이 양심을 바탕으로 최선의 용역을 제공하고 공사를 해야 하지만, 그러게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가용역비 문제 때문이다.

설계용역비 구성은 직접인건비와 관계전문기술자에 지급되는 외주비, 간접비, 기술료 등으로 이뤄져 있는데, 저가용역비는 적정한 설계인력을 투입하기 어렵게 하고, 외주비로 지급되는 관계전문기술자의 검토 및 기초조사도 부실하게 하는 원인이 돼 설계도서의 부실을 만든다. 결국 부실한 용역비와 부실한 공사비가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 되는 것이다.

정부가 각종 규제와 기준을 만들기에 앞서 설계용역시장과 건설시장이 적정용역비와 적정공사비를 받을 수 있도록 법‧제도를 먼저 마련한다면 부실한 건축물은 사라지고 건강한 건축물이 많이 만들어 질 것이다.

한편, 또 다른 문제는 이러한 건축규제와 기준에 따라 각종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수많은 용역들의 경우 전문가가 검토하고 확인해 작성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행정관청에서의 검토 및 협의기간이 장기간 소요되는 것은 물론, 해당 위원회에서 보완 및 법적기준보다 강화된 사항을 요구함으로써 사업이 지연되고 있는 현실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서울에서 발생한 지반붕괴사건을 계기로 제도화된 지하안전영향평가는 전문기관의 기술자가 작성하고 확인해 도서를 제출함에도 불구하고 허가권자를 거쳐 지방국토관리청으로 보내지고, 국토관리청에서 외부기관에 기술평가를 받느라 많은 시간을 지체하고 평가의견에 대한 보완이 이뤄지면, 이를 다시 지방국토관리청의 내부적인 검토를 거쳐 허가권자에게 최종 통보된다. 이 과정이 최소 4~6개월 소요되다 보니 이로 인한 건축허가 지연으로 사업추진이 어려운 실정이다.

건축설계를 하는 건축사는 이 모든 것을 협의 조정하는 조정가 역할을 해야 하고, 그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건축법 제106조 벌칙조항에는 건축물의 설계 및 시공 공사 감리 등의 규정을 위반해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한 설계자ㆍ감리자ㆍ시공자ㆍ관계전문기술자는 무기징역이나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른 업종에 비해 건축 관련 종사자들의 벌칙이 최고 무기징역까지로 강하게 규정돼 있는 것은 그만큼 건설공사가 중요하고, 자칫 사고가 발생한다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이렇게 강화된 벌칙만큼 설계자, 감리자, 시공자, 관계 전문기술자에게 강한 책임과 권한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을 살펴보면, 책임과 권한을 주기 위해 자격제도도 만들어 운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어떤 문제가 생길 때 마다 하나씩 생겨나는 각종 규제나 기준 및 위원회 심의 등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시행자나 사업을 수행하는 수많은 관계 전문기술자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오로지 ‘안전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사명감이 투철한 공무원과 또 다른 전문가라는 이익집단만 양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건축설계를 하는 한 건축사의 푸념이나 넋두리, 하소연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도시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건강한 건축물을 많이 만들고 싶다고 해도 부실한 용역비로 좋은 건축물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한다. 저가용역비가 아닌 적정한 용역비와 대가를 지불하고 전문가가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좋은 건축물과 건강한 건축물이 많이 탄생한다고 확신한다.

개인적으로 술자리에서 자주 사용하는 건배구호 ‘도와달라고 하기 전에 도와주자’ 까지는 아니더라도 행정관청은 행정적인 지원과 관리만하고, 전문가가 권한과 책임을 함께 갖고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문가 위에 전문가가 군림하는 세상이 돼서는 안 된다. 전문가면 전문가답게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과 소명을 갖고 업무에 임해주길 기대한다. 그러면 이 도시에는 건강한 건축물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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