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늘 / 자유기고가

정조는 세종과 함께 조선의 왕들 중 유이하게 ‘대왕’이라는 칭호에 모자람이 없는 성군이다.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비운의 세자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인 정조는 어려서부터 기상이 늠름하고 성품이 곧고 영특하여 종묘사직을 이을 기대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나이 일곱에 세손에 책봉된 정조는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이후 보위에 오를 때까지 당파싸움의 혼란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영조 승하 후 보위에 올라서도 이 같은 위협은 계속됐다. 영조가 실시한 탕평책이 점차 빛을 잃어가던 시기에 영민한 대왕의 존재는 권력의 단맛에 취한 사특한 무리에게는 더 없이 성가신 존재요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위협 속에서 1800년 49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정조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정조가 재위한 25년의 기간은 조선 역사에서 문예부흥기로 찬란하게 빛난다.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에는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숙종 이래 실각한 남인을 등용하는 등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개혁적인 지식인들을 중용했다. 이는 영조가 실시했으나 거의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던 탕평책을 계승하는 일이기도 했고, 혁신정치와 왕권강화를 이루고자 했던 정조의 속내이기도 했다.

수원은 정조가 이루고자 했던 ‘꿈’의 집합체이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군 배봉산에서 화성으로 이장한 정조는 곧 수원으로의 천도를 계획하고 수원성을 축조한다.

수원 시내 한복판을 광범위하게 점하고 있는 수원성은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특히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해 완벽하게 건설된 도시 성곽이며,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조 18년(1794년)에 시작하여 2년 6개월 만에 완공된 수원성은 당대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기술의 총동원된 대역사大役事였다.

수원성은 정조 개혁정치의 참모였던 채제공이 총 지휘를 맡고,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감독했다. 특히 정약용의 발명품인 활차와 거중기가 매우 쓸모 있게 사용됐다. 요즘의 크레인에 해당하는 거중기는 40여 근의 힘으로 2만 5천 근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공사기간이 이전에 비해 5분의 1이 단축되었다.

성곽에 벽돌을 사용한 것도 수원성이 처음인데, 돌과 벽돌을 적절히 교차시켜 쌓았다. 팔달산에 둘러싸인 계곡과 지형의 고저·굴곡에 따라 두른 성벽은 지금 보아도 아름답다. 넓은 평지의 시가지를 포용했고, 산성의 방어기능을 이 읍성에 결합했다. 상공업을 장려해 정치·상업적 기능까지 갖추었으며, 실용성과 합리적인 구조·구조물을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배치하는 등 수원성은 이때까지의 건축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이었다. 게다가 우아하면서도 장엄한 면모가 일품이다.

수원성 축성은 정조의 효성에서 비롯된 결단이자 개혁정치의 이상을 새로운 도시 수원에서 펼치고 실현하고자 했던 정조의 꿈이었다.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노론 벽파의 세력을 탕평책과 규장각 설치만으로는 약화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수원성이 완성된 이듬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다시는 정조와 같은 현명한 왕이 출현하지 않은 채 조선은 파국을 향해 스러지기 시작했다.

종결되지 못한 대왕의 꿈과 이상은 이제 그저 성곽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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